지금은 작고하신 마광수 교수님의 <즐거운 사라> 외설 논쟁을 기억하는가.
당시 사회 통념상 비윤리적 작품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마광수 교수님은 지탄받았고 또 구속되었다.
이후 무려 30년이나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예술 작품이 윤리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꾸준하다.
스윙스라는 래퍼는 <불도저>라는 곡에 “예술에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댈 거면 넌 진보하지 말고”라는 가사를 적어넣었고, 주호민이라는 만화 작가는 시민 검열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작품을 만듦에 있어 항상 올바름을 고려해야만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 자체는 표현의 자유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그럼에도, 예술 작품 속 비윤리적인 표현을 허가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보단, 예술 작품은 올발라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예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관계를 크게 세 가지로 정의하겠다.
첫 번째는 '유미주의', 두 번째는 '자율성 주의', 세 번째는 '도덕주의'다.
'유미주의'는 예술은 그 자체로서 자족한 것으로 윤리적·비 심미적 기준에 의하여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 심미주의라고도 한다.
'자율성 주의'는 때때로 작품의 윤리적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예술성과 도덕성은 독립적인 영역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예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는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2)
한편, '도덕주의'는 일반적으로 도덕적 가치, 의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견해다.3)
자율성주의와 도덕주의는 다시 극단적 입장과 온건적 입장으로 나뉠 수 있으며,4)
모든 분류는 두 가지 결론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예술 작품은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 작품은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이다.
우선, 예술 작품이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엔 '유미주의', '극단적 자율성 주의', '온건한 자율성 주의'가 있다.
'유미주의'(aestheticism)의 경우에는 미적 가치를 가장 우선시한다. 즉, 예술 작품은 오로지 심미적인 기준으로만 평가된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때때로 올바르지 않음이 심미성을 높여준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도 하다.
이는 반도덕주의(immoralism)와 연결된다. 반도덕주의는 반도덕적 가치가 장점을 구성하거나 그 장점이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만약 윤리적이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이를 불가피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극단적 자율성 주의'(extreme automatism)는 모든 예술 작품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는 독립적인 영역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로 예술 작품을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굳이 올바를 필요가 없다.
유미주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온건한 자율성 주의'(moderate automatism) 일부 예술 작품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극단적 자율성 주의와는 도덕적 판단 대상의 허용 여부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지만,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따라서 비판과 비난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가치 판단의 영역이 다르므로 예술 작품은 올바를 필요가 없다.
반대로 예술 작품이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쪽에는 '극단적 도덕주의'와 '온건한 도덕주의'가 있다.
'극단적 도덕주의'(extreme moralism)는 도덕적 가치가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은 윤리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입장에 근거한다면, 모든 예술 작품은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온건한 도덕주의'(moderate moralism/ethicism)은 일부 예술 작품만이 도덕적 판단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입장이다.
*일부 예술 작품을 도덕적 판단 대상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온건한 자율성 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온건한 자율성 주의'는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각각 독립되어 있다고 보고, '온건한 도덕주의'의 경우 두 가치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도덕적 가치가 예술적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온건한 도덕주의'의 입장에선 예술 작품이 윤리적일 필요가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 사회가 예술 작품의 올바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분류를 적용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예술 작품, 나아가 창작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비윤리적 예술 작품은 항상 사회적 이슈 거리가 되어 비판과 비난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2020년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오른 정윤석 작가의 <내일>은 비윤리적 소재인 리얼돌을 사용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는 이 작품의 도덕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이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를 분리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적 소재가 작품에 내재되어 있기에, 작품 철회는 물론 올해의 작가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5)
즉, 도덕적 가치가 우선시되어 예술성과 해당 작품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도덕주의에 가까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극단적 도덕 주의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모든 작품에 대하여 일률적인 올바름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경우 살인, 사기, 강도와 같은 비윤리적 주제 수도 없이 다루지만, 정준석 작가처럼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2003년 개봉했던 살인의 추억과 2008년 개봉했던 추격자의 경우 강간과 살인이라는 주제를 다루고도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부 예술 작품만이 도덕적 판단 대상이 되는 온건한 도덕주의의 입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온건한 도덕주의가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도덕적 판단 대상으로 분류하는지 고민해 볼 수도 있겠다.
왜 2020년대의 정준석 작가는 도덕적으로 비난받고, 2000년대의 봉준호, 나홍진 감독은 비난받지 않았을까.
각각의 시대를 기준으로, 전자의 경우는 시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적 가치를 훼손했고 후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어떤 가치가 훼손되었는지 따지지는 않겠다. 현 시점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므로.
젠더적 가치라는 포괄적인 단어로 대체하겠다.
요약하자면, 하나의 결론을 낼 수 있다. 사회가 수용할만한 작품(주로 대중예술)을 만들어야 하는 예술가라면 시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다시 반대로 뒤집어 말하면, 사회가 수용할만한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은 예술가는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나아가, 비윤리적 소재를 다뤄 반도덕주의에 해당하는 작품을 창작해도 괜찮다.
(그렇다고 비윤리, 반도덕 자체를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2016년 홍익대 정문에 설치되었던 일베 조형물이 대표적인 예시다. 반사회, 비윤리를 대표하는 일베의 손가락 조각상을 설치하면서, 해당 작가는 수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고 조각상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조각상은 결국 파손되었지만, 작가는 공식 입장문을 통해 이러한 모든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밝혔다.6)
작품으로 빚어지는 논란과 논쟁 자체가 작품의 의도라는 것이다.
물론, 예술적인 가치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비윤리성이 예술적인 가치를 만들어냈고 이는 작품에 있어 불가피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손 모양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다면 작가의 조각상은 단순 조각품 이상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작품의 사회적 수용을 바라지 않는 경우라면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입장에 근거하여, 래퍼 스윙스가 언급했던 예술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가 어떤지, 만화가 주호민 씨가 언급했던 시민 검열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대중 예술가이다. 음악 혹은 만화로, 대중, 나아가 사회 대다수가 수용할만한 작품을 만드는 처지다.
그렇게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시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즉,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예술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가 적절하며, 시민 검열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가치를 작품에 담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대중의 인기를 잃게 될 것이며, 상업적 성공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상관이 없다면, 이들의 예술 작품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는 부적절하며, 시민 검열이라는 단어는 적절하다.
이들이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는 없어진다.
우리 사회는 도덕주의 사회이다. 다행히도 극단적인 도덕주의를 요구하진 않는다.
각 시대마다 다르지만, 시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에, 사회는 작품의 수용을 거부한다.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도덕적인 가치와 결부하여 예술적인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예술작품은 올발라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사회에 수용될 필요를 느낀다면 작가는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올바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굉장히 무책임한 결론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혹은 예술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라, 추구하지 말라는 강요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덕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합의를 존중하되, 이후엔 작가의 선택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했으면 하는 지점은 존재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온건한 자율성 주의에 근거하여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예술적 기준대로 평가하고 작품의 도덕적 가치는 도덕적 기준으로 각각 평가하자는 것이다.
연좌제, 연대 책임처럼 도덕적인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서로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하는 예술가들도 활동이 어렵지 않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것 하나만 바뀐다고 해서 전위적인 작품이 폭증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작품이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 조금씩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 “유미주의(唯美主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1431.
2) 안계윤, 우탁. (2011), 예술작품으로서 디지털 게임의 도덕적 기능에 대한 연구,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v.11 no.6. pp.159-170
3) “도덕주의”,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71512&cid=40942&categoryId=31532
4) 미학대계간행회, “현대의 예술과 미학”, 2007.
5) 이은주, 2021.01.24,“이토록 적나라한 리얼돌 다큐... ”작가상 후보 박탈“ 요구도”, 중앙일보, https://news.joins.com/article/23977164
6) 김예지, 2016.06.01., “홍대 앞 일베 조형물 작가는 ‘성공’했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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